믿음을 위하여

허대영의 성지순례기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 보도자료

미스터가가멜 2016. 6. 18. 11:32

허대영의 성지순례기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

- 온라인 서점용 보도자료


1.도서명 :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

2.책쓴이 : 허대영

3.정가  : 18,000원

4.출간일 : 2016년 3월 15일

5.ISBN : 979-11-86066-21-8

6.쪽수 : 418p

7.판형 : 152*226

8. 분류
  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 > 신앙생활 > 영적성장
  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 > 문학/문화 > 신앙, 기행에세이


9. 책 소개

 기독교의 세계화에 가장 큰 공헌을 남긴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떠난 성지 순례 길 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실재하심을 확인하고
예수님을 동행한 바울을 만나 묻고 답하는 등 성스러운 대화를 하면서
말씀에 기록된 것을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는 감동적인 과정을
사진과 지도를 곁들여 기록한 성지 순례 지침서이자 신앙고백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지 순례의 길로 보내 주시는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인천공항을 터키 이스탄불 공항을 거쳐 샨느우르파, 하란, 다소를 거쳐 카파토기아, 파묵칼레, 소아시아 일곱교회, 에베소, 아테네, 고린도, 마테오라, 베뢰아, 데살로니가, 아볼로니아, 암비볼리, 네압볼리, 빌립보, 다시 이스탄불의 성지를 순례하며 바울의 1,2,3차 전도여정지를 방문하면서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전도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와 ‘하나님은 바울의 전도를 돕기 위하여 어떤 고난과 능력을 준비해 주셨는지’ 그리고 ‘바울의 그 전도 열정은 오늘날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보고 느끼고 다짐하면서, 간간히 기독교 유적 이외의 터키와 그리스를 역사와 문화, 유물을 정리하여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도록 다양하게 정리하였다.


10.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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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 하란, 아브라함이 살던 곳에 도착하다.

----- 하란(Harran)-----
 터키 고대도시. 현재 터키 명으로 알튼바삭(Altinbasak). 우르파(Ulfa)에서 시리아 국경 도시인 악차칼레(Akcakale)까지는 50Km거리인데 이 길로 국경으로 가다가 악차칼레 10Km전에 하란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10Km 더 들어가면 전통 흙집이 있는 하란마을이 나온다.

 하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터키 남동부, 샨느 우르파에서 남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 하란은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머물렀던 곳으로 데라는 여기서 숨을 거두었고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과감히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현재 하란은 아직도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로 오지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을 곳곳에는 하란의 역사를 보여주는 성채와 집터, 그리고 통칭 에그 하우스라고 불리는 전통 원추형 흙집이 있어 특산물 판매장이나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하란은?-----
 첫째,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체류한 중간 기착점이다(창11:31~32, 행7:2~4). 둘째, 하란 체류 중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으로 가라는 소명을 재차 받은 곳이다(창12:4~5). 셋째,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고향이며(창24장), 훗날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한 곳이다(창27:43). 넷째, 야곱이 하란에 거주하는 외숙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있으면서 4부인에게서 11남 1녀를 낳았다(창29:30:). 다섯째,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한 도시로서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왕하19:12). 여섯째, 티그리스 강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고산'과 '갈그미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여 통상로의 교차점이 되었고 교역의 중계도시로 번영했다(겔27:23).

----- 아브라함 가문과 하란 -----  
 첫째, 아브라함(Abraham)이 우르를 떠난(BC 2000경) 뒤 처음 머문 장소가 하란이다. 이곳에서 아버지 데라 일행은 한동안 머물렀다. 둘째, 아브라함의 형제들 중 나홀의 집안만 이곳에 남고, 그는 가나안을 향해 떠났다. 셋째 나중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내어서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리브가가 곧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가 된다. 넷째, 또한 하란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야곱이 하란에 있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기도 한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간 하란에서 데릴사위 노릇을 하였다. 다섯째 야곱은 이곳 하란에서 네 여인으로부터 장남 르우벤을 비롯하여 11남 1녀를 얻었다. 이렇듯 아브라함 가문 5대에 걸쳐 정신적 고향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하란이다.

----- 성경말씀 : 창세기 24:10~11; 27:43~45; 28:10~12; 29:3~6 -----
하란은 아브라함 가문의 5대 동안 고향이다.

□ 창세기 24장
10. 이에 그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 창세기 27장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 창세기 28장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 창세기 29
0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0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0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바로 이곳이 5,000년 동안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사이를 연결하는 무역의 통로 역할을 맡았던 하란이며, 서쪽으로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있어 광활한 농토를 볼 수 있다.

 천문관측대를 방문하다. 천문관측대는 하란대학 터에 붙어 있었다. 당시 별들을 관측하던 천문 관측소는 지금도 옛 모습의 일부를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첨성대처럼 뚜렷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아 설명을 하니까 ‘그러려니’ 하지 처음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통 유적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란대학 터를 방문하다. 하란의 성읍 북쪽에 있는데 주로 의학 그리고 수학과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손자 홀라구가 1,259년, 시리아 원정길에 이곳을 진출하여 시민들이 저항했다하여 성을 함락한 후 전 시민들을 학살하고 모든 건물은 기둥뿌리 까지 뽑아버려 폐허가 되었다한다.
 자연원통형 흙집을 방문하다. 하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건축양식이 특히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즉 집의 지붕을 진흙으로 구운 벽돌을 사용 4~5m 높이의 원뿔 모양으로 높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천장에 공간을 많이 둠으로 해서 한 여름의 태양열을 감소시킨 것이 특징인 흙집이다.
 이 흙집은 지붕이 몇 개가 겹쳐져 있는데 부엌, 거실, 응접실, 창고 등으로 사용하도록 연결되어 있다. 집 구조는 매우 단순하지만 흙으로 지어져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아랍인들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일종의 전통가옥 민속촌과 같은 곳이었다. 마당에는 천막을 치고 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음료수와 그곳 특유의 차도 팔고 있었으며 가옥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판매용 토속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거리에 개들이 거리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다니는 관광객을 슬슬 쫒아 다니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이후 터키나 그리스를 여행되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가끔 달려와 무엇을 사라고 하거나 돈이나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한다. 우리가 저들보다 좀 더 풍족하게 산다고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해도 되는 것인지…..
 6.25 직후 우리 모습이 이랬으리라. 실제로 우리 고향 홍천 동면에 있던 옛 면사무소 터에 미군이 주둔해 있었다. 나는 어린 나이(다섯 살 정도 되었을 꺼다)에 ‘기브 미’ 하면서 미군을 쫒아 다녔고 껌이나 초콜릿 등을 얻어먹었다.  
16:49, 야곱의 우물을 방문하다
 하란 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다. 비잔틴시대에 융성하던 기독교유적은 오스만제국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관심에서 멀어진 유적으로 남아있다. 야곱의 우물은 손을 보기는 했으나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 모든 유적들은 성경적 사실을 증명하는 상징적 모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성경말씀 : 창세기 24 : 13~15 -----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다

13.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야곱이 오랜 기간 걸어서 밤으로는 노숙하며 라반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로 만난 소녀가 라헬이었을 것이다. 첫 눈에 반한 야곱은 7년간을 머슴을 사는 대신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하였다. 결혼식 날 밤 라헬인줄 알고 잠을 잤는데 그 여인은 라헬이 아니라 라헬의 언니 레아였다. 외삼촌에게 속은 것이다.
 야곱은 칠일을 채우고, 7년을 더 섬기기로 하고 라헬도 아내로 맞았다. 결국 야곱은 두 자매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나중에는 그녀들의 시녀들까지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살았다. 야곱의 자손들이 많아졌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12지파의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 성경말씀 : 창세기 29 : 26~30 -----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다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위하여 칠 년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15:20, 야곱의 우물에서 출발하다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버스를 타야 했다. 이때 목사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순종의 믿음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설교 말씀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들 이삭을 드리려고 했던 것 한번이고 나머지는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씀하신다. 피곤이 겹쳐 자면서 들으니 얼마나 알아들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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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알바츠(Yalobatch), 우리가 아는 성경 상의 지명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다.
 
-----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 Antiokheia) ------
 콘야에서 알바츠까지 거리는 180km이고, 알바츠에서 파묵칼레까지는 콘야에서 알바츠 보다 2배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비시디아 지역의 안디옥(안티오키아 Antiochia)으로서 수리아의 안디옥(안티오키아)과는 다른 곳이다. BC 25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재정비되고 티베리우스 황제 하에서 꾸준한 발전을 이룩한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바울 당시 비시디아 지방의 수도로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 이방인들도 대거 거주하는 대도시였다.

 사도 바울은 제 1차 선교여행시 베르게에서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의 안티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선교하였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두 안식일을 걸쳐 먼저 유대인에게 선교했으나 배척당하고, 이방인들이 사는 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는 갈라디아 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 성경말씀 : 사도행전 13 : 13~16 -----
바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 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기념교회는 타원형 부분(아마도 강단 쪽인 듯)만 남았다. 미국의 미시간대학 고고학 팀에서 발굴했다는 안내판이 있다.
 아직도 수많은 유적 파편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황량한 벌판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 많이 아프다. 예수의 생명력이 멈춘 이곳에 다시 복음이 일어나기를 소리쳐 봤다. 언젠가는 에스겔 37장처럼 일어나리라.

----- 성경말씀 : 에스겔 37 : 9~10 -----
마른 뼈들이 살아나다

0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 데 극히 큰 군대더라

 오랜 세월과 지진과 화재 등으로 무너진 안디옥 교회터. 찬란했던 당시 모습은 간데없고 깨어진 로마식 건물 돌조각과 무너진 기둥만 남아있다. 중앙 진입로인 로만대로는 돌로 바닥을 포장한 흔적이 남아 있고 거대한 공연장은 일부 무너지기도 했으나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복원을 위해 관중석은 물론 중요한 돌마다 번호를 새겨놓고 있었다. 지속적인 물음을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의 영향 하에 있는 예수님의 역사현장이 언제 복원되어 예배드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될 것인가. 함께 통성기도를 하다.

----- 잠깐! 안디옥 이라는 지명에 관하여 -----
 참고로, 비잔틴제국 시대 당시에 ‘안타키아(안디옥)’ 라는 지명(地名)은, 아나톨리아 지역에만 무려 10여 곳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다음 대왕의 부하 중에 왕이 된 부하가 넷이 있는데, 이 네 명 중에서 시리아・소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왕이 된 셀레우코스 1세가 지역 요지에다가 도시들을 건설할 때, 그의 아버지 이름인 ‘안티오코스(Antiochos, 안디옥)’의 이름 따서 건설했다. 바로 그런 도시들이 안디옥이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비시디아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으로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방문하지는 못해 안타깝지만, 수리아 안디옥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 수리아 안디옥(현재이름 Antakiya) -----
 시리아와의 접경지에 있다. 현재명은 안타키아이다. 행정 구역상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 오론테스강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으나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
 초기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베드로에 의해 지도되었다. 산기슭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은 초대 안디옥 성도들이 모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동굴 안에는 비잔틴 시대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시작된 핍박으로 예루살렘 중심이었던 초대교회가 지경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기지가 된 곳이 수리아 안디옥이다. 유대인에게만 전하던 복음을 유대가 아닌 곳에서 이방인(헬라인)에게 전한 첫 도시이기도 하다. 수리아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착하고 성령 충만한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했고 바나바는 회심하여 고향에 돌아가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동역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얻었고 바울의 선교여행의 출발점이자 든든한 후원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 성경말씀 : 사도행전 11:22~26 -----
바울, 안디옥교회에서 전도하다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처럼 수리아 안디옥은 복음의 역사에 있어서 예루살렘 만큼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수리아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자유민만 30만 명 이상이 거주한 로마제국의 세 번째 도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사족 : 지명・인명에 대한 생각 -----
 이 글을 쓰다 보니 원어로 된 지명・인명을 미리 표시해 두거나 방문하는 곳의 안내판을 찍어 두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개신교와 가톨릭은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서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인명, 지명은 논의를 통하여 어떤 교회 교파에서든지 통일하여 써야 한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고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고대 지명과 오늘날의 지명이 완전히 다른 곳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도 성경 번역할 때에는 ( )속에 부기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혼란을 방지하기도 하거니와 쓸데없는 일에 힘의 낭비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글 성경에 있어서도 구브로는 키프로스로, 애굽은 이집트로, 바사는 페르시아로 현대에 쓰이는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1:19, 알바츠, 비시디아 안디옥교회에서 출발하다.
11:50, 식당에 도착하다. 뷔페식당인데 김과 김치를 제공해 주신 분이 있어서 밥을 많이 먹었다. 오이와 풋고추를 고추장을 듬뿍 찍어 우적우적 먹으니 기운이 난다.
12:24, 식당에서 출발하다.

 알바츠에서 파묵칼레로 가는 길, 터키에서 처음 보는 첩첩산중의 길이다. 차량 통행이 전무한 높은 고지대를 가는데 한쪽은 산비탈이고 그 반대쪽은 낭떠러지 길인데도 안전장치라고는 거의 없다.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가고 있다.

----- 사족 : 국기 게양에 대하여 -----
 이 나라에는 국기를 많이 내걸고 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가정에도 가는 곳 마다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 투르크가 있다고 한다. 그의 위대함이 새삼 떠오른다. 
 우리의 국부는 누구인가. 이승만대통령은 한때 국부였다. 이승만 박사는 기독교 신앙을 지닌 분으로 우리 독립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주적 기본 질서만 잘 정착시켰어도 오늘날 이렇게 애증愛憎의 위치에 있지는 않을 터인데……. 안타깝다.

14:12, 휴게소에 도착하다. 넓은 초원에 이 휴게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휴게소 옆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그곳에서는 아이스크림 비슷한 것을 먹었다. 넓은 주차장에 쾌적한 환경을 갖춘 휴게소였다.
                                                                      - pp. 101~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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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0, 버스에 승차하다. 밤사이에 비가 와서 다소 쌀쌀하다. 이즈미르를 향한다. 쿠사다시에는 비행장이 없어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로 가기 위해서는 이즈미르로 이동해야 한다. 밧모 섬에 못간 대신 비행기를 한 번 더 타게 된 것이다. 
 가이드가 그리스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첫째, 인구가 적다. 둘째, 유적 때문에 살고 유적 때문에 죽는다(아무 곳이나 파면 유적이 나온다. 하여 개발하기가 어렵다). 셋째, 산악지대이다. 넷째, 약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았다(국가가 개인을 위하여 해 준 것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개인을 중시하고 애국심은 약하다). 참고하리라.

09:30, 이즈미르 공항에 도착하다.
 공항에서 천진난만한 시리아 두 어린이와 그 어머니를 보면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다짐해 본다. 사상이나 가치관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지 않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에 글을 몇 편 쓰다.

----- 생각조각 ----
 
아시아의 7대교회를 보며

2013.4.8.08:22.

바울의 서신을 따라
곳곳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았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거대한 자태로 
피었더랬습니다.
바울의 사랑과 열정이
곳곳마다 넘쳐흘렀습니다.
그 넘침이 헬라로 로마로 
쉼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흘러가더라도
뿌리는 이곳에 남겨 자라게 하고
씨앗이 되고 열매 맺게 해야 하는데
아주 작은 흔적마저 모두 휩쓸어 가
지금은 모스크의 첨탑이
도시를 뒤덮고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소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로마에서, 서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아시아로 흘러간
당신의 크신 사랑이
이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이곳에 회복의 역사로 복귀되기를 원합니다.
아라랏산의 방주가 다시 움직이고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며
소아시아 일곱교회 터의 잡풀도 거두어주시고
다시 누워 있는 돌들이 일어나게 하소서
우렁찬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 땅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늘이 다시 열리고
강물과 바다가 다시 만나며
바람이 벌판을 내달리게 하옵시고
하나님을 닮은 형상들이
함께 꿈꾸며,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인도하옵소서.

 짧은 글을 하나를 또 쓰다.

----생각조각 -----

바울에게 항의한다.

2013.4.8.08:29

어떻게 하셨기에
2,000년도 안된 지금,
이렇게 처참하게 될 수밖에 없도록
허술하게 하셨나이까?

속히 돌아오셔서
그때 철저하지 못했던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사명을
다시 감당하여 주옵소서.


10:58, 비행기에 오르다. 50분 간다고 하니 잠깐이다. 비행기회사는 PAGANS AIRLINE 이다. 좌우로 3열식이다. 창가여서 다행이다. 에게 해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옛날, 고대 그리스의 앞마당 에게 해. 그 장엄한 풍경을 하늘에서 보는 것도 밧모섬 성지순례에 버금가는 기쁨이며 경험이 될 것이다.

11:05,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면에는 11:53분에 도착 예정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 pp. 204~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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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식사를 하다.
08:25, 승차하다. 오늘은 고린도로 갔다가 중부 그리스로 이동한다. 장시간 버스를 타기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기는 하나 어쩌랴!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3km쯤 내려가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초입에 현대 고린도가 있고 거기서 서남쪽으로 6km 더 내려가면 옛 고린도 유적이 있다.
10:28, 고린도 운하가 시작되는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가게에는 우리의 땅콩엿과 비슷한 것이 ‘맛보기’로 내놓고 있어서 오가며 주워 먹었다. 이곳에서는 가이드로부터 아테네, 고린도,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5$ 주고 그리스 지도를 한 장 샀다. 누군가 제공하는 커피도 한잔 마셨다.
10:45, 승차하고 고린도 운하를 지나간다. 장관이다. 깊다. 버스도 천천히 가면서 사진 찍을 기회를 주었다. 사방에서 감탄이 터진다.

----- 고린도(Corinth)운하 -----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에게해 쪽에는 겐그레아 항이 있었고 이오니아해에는 레가이온 항이 있었다. 겐그레아 항에서 레가이온 항까지 해로는 무려 320Km가 되나 육로는 6Km 남짓한 거리이다. 해상을 통해 가면 320Km를 항해를 하여야만 되기에 소형 선박들은 고린도의 제일 좁은 부분 지협에 통나무를 깔고 그 위에 배를 올려놓은 채 통나무를 굴려 육지를 건넜다고 한다. 통나무 롤러로 만든 운송수단으로 배들을 통과시켜 주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옛날 통나무 롤러로 배를 운송하던 곳에 지금은 운하가 건설되었다. 이 운하건설은 BC 600경에 폭군 페리안더(Periander)가 1차 시도, AD 65경에 네로(Nero)가 재시도 했으나 실패하고 약 1800년 후인 1881년에 프랑스 건설자들이 3차 시도하여 1893년에 완공을 했다.

 고린도운하는 파나마운하, 수에즈운하와 함께 세계 3대 운하 중 하나다. 수직으로 깎아 내린 절벽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섬으로 만들었다. 두부를 반듯하게 자른 듯이 바위를 잘라 만든 고린도 운하. 마치 마추피추의 석조물을 보는 것 같다. 다리에서부터 해면까지는 86m, 수심 깊이는 10m, 해면의 폭 22m, 길이는 6.3km. 위로 올라오면서 점점 더 넓게 파여서 큰 크루즈도 다닐 수가 있게 건설되었다.

11:05, 고대 고린도에 도착하다.
 고린도. 얼마나 많이 들어 온 곳인가. 역사적으로는 도시국가로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었고 종교적으로는 바울이 선교하고 서신서 썼던 곳이며 ‘고린도 전서(에베소에서 저술)・후서(마케도냐에서 저술)’ 라는 이름으로 오랜 전 부터 기억에 남아 있는 도시였다. 그곳에 지금 와 있으니 감격을 무엇으로 전하랴.

----- 바울에 고린도에서 쓴 서신서들 -----
총 4권을 쓴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① 데살로니가 전서 ② 데살로니가 후서 : 제2차 사역여행 때 고린도에서 기록(행 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③ 갈라디아서 : 제2차 사역여행 때 고린도에서 기록(행 18:11, 일년 육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니라)
④ 로마서 : 제3차 사역여행 때 고린도에서 기록(행 20: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하고)

----- 고린도(Corinth) -----
 옛 고린도 자체는 항구도시가 아니지만 북쪽과 동쪽에 항구들을 끼고 있어 상업이 번창했다. 북쪽 고린도 만에는 레가이온 항구가 있어 아드리아 해로 통했고, 동쪽 샤론 만에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어 에게 해로 통했다.
 BC 44년 카이사르는 고린도를 로마인들이 사는 식민 읍으로 재건했다. 마침내 BC 27년 아가야(지금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대)속주를 총독부로 승격하였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동방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사는 인종 박람회장 같은 도시였다. 시민수는 13만 명을 넘는 것 같다. 자연히 종교도 매우 다양해서 마치 종교 전시장 같았다.
 이와 같이 바울이 전도한 고린도는 종교 다원사회였고 교통과 상업이 발달해서 경제적으로 윤택했으나, 흔히 항구 도시가 그렇듯이 문화적으로는 천박하고 윤리적으로 퇴패했다. BC 46년 이전의 전설이기는 하나, 고린도 뒷산 꼭대기에 있던 아프로디테 여 신전에는 신창神娼 1천명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아테네에서의 전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고린도로 내려가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활발히 전도하여 큰 교회를 세웠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에 내려와서 데살로나가 교우들의 충실한 신앙생활을 전하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곧 데살로니가 전서이다. 이 전서는 바울 서간집 중에서 뿐 아니라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쓴 서신서이다.
 고린도 유적은 아폴로 신전, 고린도 시장, 연단 축대(베마 : 아가야의 갈리오 총독이 사도 바울 심문한 곳)등이 있으며, 고린도박물관에는 고린도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고린도는 1,458년 사라센*에게 점령되었고 1,858년 대지진으로 지상에서 사라진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사라센 제국(Saracens) : 이슬람교를 믿는 자들이 서남아시아 일대에 세운 대제국의 총칭.

----- 성경말씀 : 사도행전 18:1~8 -----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다

01.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0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0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0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0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0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0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0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여기서 바울의 고린도 전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는데, 고린도에 가기 전에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전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크게 실망한 그는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오기를 기다리던 실라와 디모데도 만나지 못한 채 서둘러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다.
 바울은 이미 아덴에서도 실패의 경험이 있어 마음이 무척 약해졌었는데 고린도에 와보니 너무 도시가 타락하여 있었기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도 아직 만나지 못하였기에, 염려도 되고,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해주셨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살다가 총독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에 고린도로 쫓겨 나온 부부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들 부부가 바울보다는 조금 일찍 고린도에 왔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부부를 미리 고린도에 보내 놓으신 것이다. 이들은 ‘실패자와 추방자’였고 게다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친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큰 도움을 받았다.

-----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6:9~10 ; 2:3 -----
바울은 처음에는 고린도의 죄악을 열거하며 두려워하다

- 고린도 전서 5장
0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0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 고린도 전서 6장
0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고린도전서 2장
0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대 고린도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위산(시시포스의 산, 아크로 코린트, 570m)이다. 바위산 위에 아크로 고린도성은 몇 중으로 성문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기에 적이 들어 갈 수 없는 탄탄한 요새였다. 오디세우스의 아버지인 시시포스는 잔머리 쓰는 것으로 생각해 볼 때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인물로, 그는 잔머리로 신을 기만하게 되고, 결국 죽어서 가혹한 형별을 받게 된다.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이 바위가 정상에 다다르면 '돌 굴러가네' 소리와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그는 쇠똥구리처럼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늘 반복되는 인간의 죄된 삶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 가슴이 저리다.

----- 시시포스(Sisyphus)의 신화 -----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라고도 한다.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에 의하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신과 대립하다가 어려움을 겪는다. 헤르메스가 이복형인 아폴론의 소를 훔친 것을 알려주기,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것을 알려주기, 저승사자 타나토스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감옥에 가두기 등으로 하데스의 노여움을 사 결국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는 형벌을 주었다. 시시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시포스는 지금도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다 한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은 끔찍하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시시포스의 노동 앞엔 오직 영겁의 되풀이 되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도 그냥 매일 의미없이 그냥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생각조각 -----

시시포스여!

2013.4.9. 11:30

시시포스여!
지금 그대는
산등성이 어디쯤에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는가
아니면 다시 굴러 내리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내려다보고 있는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되는
그대의 무거운 땀의 행진에
하늘에 닿을 경의를 표하며
지금도 그대를 따르는 자들이
수십억이 넘을 수 있음을
즐기며 기뻐하기를
원하노라.

바람은 불고
안개는 흐르고
태양은 돌비늘에 이글거리는,
그리하여 인간 욕망의 거대한 바위를
날마다 끌어 올리는
그대의 후배들이 많이 있노니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고 있는 그대의
계속되는 사투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노라
시시포스여! 수고하라.

우리는
바울을 따라
주님의 따뜻한 품속에
푹 안기리니…….

11:20,  레가이온 길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고대 고린도 시를 돌아보게 되다.
                                                                      - pp. 242~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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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 하차하다. 그동안 주로 성 소피아성당이라고 불러 왔는데 이곳에서는 하기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매우 독특한 이 건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파손되기도 했지만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평가된다. 놀랍게도 6년 정도(532년 착공, 537년 완공)의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

-----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그리스어로는 하기아, 터키어로는 아야) -----
하기야(그리그어), 또는 아야(터키어), 또는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에 있는 비잔티움 예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니카의 반란*(532)으로 불타 버린 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하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황제의 대관식, 전승 기념 등의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정사각형의 벽 위에 원형의 돔을 올려놓는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중앙을 차지하는 돔은 지름이 31m나 된다. 네 개의 첨탑(미나렛)과 내부의 아랍어 장식은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면서 세웠다. 1935년 이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종교 행위도 금지되고 있다.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로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 건물 '성 소피아' 성당. 원래 명칭은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로 ‘신성한 예지’銳智를 뜻하며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었다. 지금은 비잔틴제국의 성당양식과 오스만제국의 이슬람양식이 섞여 있지만, 본래의 성당은 비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고 있을 때인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은 것을, 532년~537년에 걸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으로 완공하였다.
* 니카의 반란 : 로마에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경기가 팀으로 나누어서 히포드롬 이라는 원형경기장에서 열렸는데 경쟁이 심해져, 나중에는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를 외치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대한 반란(532년)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3만명을 학살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성소피아 성당은 그리스 정교의 총 본산이었지만 오스만에게 정복을 당해 이슬람 사원이 되었었는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useum)'이라고 한다. 성당을 건축할 때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론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과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당시 헌당식에 임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나머지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라고 외치며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비잔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 돔의 높이가 50m가 넘어 엄청난 하중荷重을 견뎌야 함에도 가운데에 기둥이 없는데 사방에 나 있는 아치창이 그 무게를 분산시켜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아야 소피아 성당에는 몇몇 모자이크화가 남아 있다. 처음 이 성당이 건립될 당시 있었던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령 하에 우상숭배를 금한다 하여 거의 없어졌으나, 최근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면서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오스만이 제국이 이곳을 점령한 후 회칠하였기에 그 속에 얼마나 더 많은 성화가 아직 있는지 알 수는 없다.

 황제의 문(제국의 문) 위에 벽화그림이 눈에 띈다. 가운데 앉아계신 예수의 양쪽 옆으로 오른쪽 원에는 띠를 든 천사 가브리엘, 왼쪽 원에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예수의 오른쪽 발 아래에는 레오 6세 황제가 무릎을 꿇고 재혼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예수의 왼손에 들린 책의 글귀는 그리스어로 "너에게 평화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복음서의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중앙 대형 돔에는 사방에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 곳만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고 나머지 세 천사의 얼굴은 이슬람에 의해 모두 훼손되었다.

 1,543년, 오스만이 점령한 후 한 때 헐릴 위기까지 처했으나 건물의 아름다움에 반한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모스크의 상징인 미나렛 4개가 외관에 세워지고 내부에는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과 계단 양식의 설교대 민바르를 더 세워서 모스크로 사용하였다.

 성당 안 모자이크 벽화 중 가장 유명한 '디시스(The Deesis, 간청, 탄원이라는 뜻)'다. 이 성화는 비잔틴제국의 미하일 8세 팔레오로고스(Mikhael Ⅷ Palaiologos)황제가 제 4차 십자군이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해인 1,261년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성화는 빛이 항상 등장인물의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성화는 실제 빛까지 그 방향에서 들어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수심이 가득한 성모 마리아와 세례요한이 예수를 가운데 두고 서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그림의 특징은 ‘모나리자’에서 보듯이 어떤 방향에서 보아도 예수의 눈이 따라 다닌다는 점이다. 이 성당의 많은 성화들은 15세기 비잔틴예술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의 작품으로 이 성당이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던 지난 500여 년 동안 석회칠로 덮여 있었던 것을 1970년대에 이르러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복원하면서 그 회칠을 벗겨내려 하자 그림들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디시스’ 보고 조금 더 가면 갤러리 끝에 창을 사이로 두 개의 모자이크화가 더 있다. 왼쪽의 모자이크화는 앉아 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여황제 조에(Zoe)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가 있다.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양옆에는 콤네노스 황제와 부인 이레인과 아들인 알렉시우스가 있는데 성금 주머니와 봉납 명세서를 들고 있다.

----- 이스탄불은 건축 종합 전시장 ----- 
 이스탄불은 흑해와 지중해 사이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로 그리스식 열주와 기독교 성당, 로마의 건축, 비잔틴의 건축과 이슬람의 모스크가 1km 이내에 공존하는 세계 유일도시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남쪽의 이스탄불 시가는 유럽지구와 아시아지구로 나뉘어있는데 아시아지구는 주로 주거지역이고 유럽지구에는 성 소피아 성당, 블루모스크, 톱 카프궁전 등 화려한 건축물들이 집중되어 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로는 지금의 건축기술로도 기둥이 없이 이런 거대한 공간을 짓기가 쉽지 않다는데 무려 1,5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지었다니 놀랍기 짝이 없다.

 이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면서 내부 곳곳에는 둥근 원판에 알 수 없는 글들이 쓰여 있는데 알라신과 모하메드, 알라 등 이슬람교 성직자들의 이름이라 한다. 부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교의 흔적으로 가득한 성당 내부를 보면서 참담함이 몰려온다. 하나님께 드리는 성스러운 건물로 남아 있었다면 성지 순례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으리라. 그러나 한편 현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해 본다.

 1,453년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고 그들 제국의 수도로 삼는다. 그리고 너무나 훌륭한 건축물이었던 기독교 예배당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 않고 그들의 모스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에 필요한 성화가 건물 내부 전체에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그려져 있었으나 우상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아야 소피아의 내부벽면은 회벽으로 모두 덧칠하였다.  그 위에 코란으로 내부를 장식하고 하루에 5번 기도의 시간을 나팔로 멀리 알리기 위하여 4개의 첨탑(미나렛)을 새로이 덧붙였다. 이렇게 기독교 예배당을 자신들의 모스크로 개조하여 사용하기를 150여년이 지난 1,609년 14대 술탄 아흐메드는 이슬람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모스크를 짓기를 명한다. 그리하여 7년 후인 1,616년 현재의 블루 모스크가 완성됨으로써 아야 소피아에서의 더부살이 기도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어느 곳에 가니 기둥의 패인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떼지 않고 한 바퀴 돌리면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는 ‘마리아의 손(땀 흘리는 기둥)’이 있는데 ‘꽃보다 누나’에 나왔던 곳이다. 또 옴파로스(Omphalo)는 라틴어로 '배꼽'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중앙' 또는 '중심'을 의미하는데 로마로부터 세계의 중심을 옮겨왔으므로 당연히 세계의 중심이고 황제의 대관식 등 중요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출구 쪽으로 나오니 천정에 또 다른 모자이크 벽화가 보인다. 이 벽화는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도시(콘스탄티노플)를 바치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왼쪽에는 교회(이야 소피아 성당)를 봉헌하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야 소피아성당을 본 감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그래도 이슬람이 파괴하지 않고 이를 모스크로 활용한 것이 아야 소피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아이러니하다.
 요즘, 터키가 다시 원리주의로 돌아가는 것 같다. 터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명소인 성 소피아성당을 박물관에서 다시 이슬람사원으로 바꾸려던 여당의 시도가 보도(2013.05.07. 연합뉴스)되고 있다. 염려된다.

----- 생각조각 -----

아!, 아야 소피아여!

2013.4. 12 :10:55

떨리는 맘으로
성소피아성당 안으로 들어선다.
웅장한 규모의 황제의 문을 지나면
찬란하게 미소 짓는 모자이크.
예수님은 가운데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대천사 가브리엘,
아! 황제 레오 6세는
무릎을 꿇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거대한 돔 지붕이
하늘 높이 떠 있다.
도대체 기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슬람 모스크에서 볼 수 있는
돔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은
어느 곳에도 없다.
감동이다.
돔 가운데 저 꼭대기에
그리스도를 가슴에 안은 마리아 상이
천장에 뚫린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하늘의 빛으로 우리를 만난다.
살아서 숨 쉬는 듯한 부드러운 색감이
수많은 인물 벽화들 중에 살아나고
그중에서도
그리스도를 중앙에,
성모마리아를 왼쪽에,
세례자 요한을 오른쪽에 묘사한 
아야 소피아의 대표 성화가
눈길을 잡는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면서
모스크의 상징인 미나렛* 4개가 외관에 세워지고
내부에는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미흐랍*
계단 양식의 설교대 민바르*
우상숭배를 금한다고 모든 벽화는 회 덧칠하여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감추어 버리고 
웅장한 돔의 벽면에는 알라와 그 계승자인
술탄을 의미하는 거대한 아라비아어 글씨 현판이
여기저기 흔들리며 둥둥 떠 있다.
숨어서 500년을 지낸 벽화들이
복원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화려함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으니
모두 크신 역사하심이리라.

고난의 사연과 수차례의 대지진 때도
끄떡 없었던 그대, 아야 소피아여!
웅장한 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대이기에,
회칠하고 구조를 바꿔도
변하지 않는 그대만의 존재감이 있기에
감히 그 누구도 쳐다 볼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함이 아니던가.

아야 소피아여!
곧 본래의 빛을
발할 수 있으리.
꼭, 그리 될수 있으리.
눈물로 기도하라.
성도들이어!

* 미나렛 : 모스크 외부에 세워진 첨탑으로 오늘날로 치면 알람시계 겸 마이크 역할을 하던 시설이다. 첨탑의 꼭대기에선 ‘무에진’이라는 사람이 하루 다섯 차례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지르도록 만들어졌다. 미나렛이 1개인 것은 개인이 지어 기부한 것이고 2개인 것은 장군, 3개인 것은 국가, 4개 이상은 술탄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 미흐랍 : 무슬림들의 기도 방향(메카를 향한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스크에 가면 정면에 아치형 모양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가리키며 그 모양과 크기는 각양각색이다.
* 민바르 : 이슬람교에서 설교(khuṭbah)하는 연단. 가장 단순한 것은 3칸의 계단이 이어져 있으며, 대체로 계단의 위쪽에 반구형의 상자가 달려 있고 또 여닫이문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오를 수 있다. 마호메트는 원래 메디나의 모스크에서 종려나무 기둥에 기대어 설교했다.

                                                                          - pp. 336~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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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 아타 투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다. 이제 터키에서의 일정을 마치게 되었다.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성지 순례였다. 226 Gate 8시 20분까지 집합하라고 한다. 아내와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장소로 가다. 

 그리스와 터키의 주요 도시와 유적지를 일주하는 13일간의 여정을 끝내며 이스탄불 유람선 관광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너며 유구한 역사의 한 토막을 섭렵했다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아주 짧은 일정으로 2,000년이 넘는 그리스와 터키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가르쳤던 이 무지했던 교직생활을 어찌하며, 그때 그 학생들을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초・중・고등학교 사회과 선생님들은 정말 여러 곳을 다녀보고 생각을 정립한 후에 아이들에게 산지식을 가르쳐야하겠다고 생각해 본다.
 산악지대와 넓은 바다와 민주정치를 비롯한 고대문화의 발상지인 그리스, 광활한 평야와 영토를 가졌고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융성을 이루었던 돌궐이라는 유목민 국가의 생태적 특성을 지닌 두 문화의 교차점, 그리고 이스라엘의 헤브라이즘과 그리스의 헬레니즘의 갈등과 융합을 보면서 지구를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이 여기에서 명멸하였음에 전율한다.

 그리스인들이 이루어 놓은 고대 도시 국가가 에게해 연안에 산재하고, 그들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침범과 전쟁, 기독교 국가로 변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에서 이슬람교인 오스만 제국으로 변천해 왔던 보스포러스해협의 과거를 눈에 담아 간다. 그러나 터키는 가능성이 풍성한데 비하여 그리스는 채권국들이 그리스 채무이행안을 승인하고 있는 중이니 미래가 밝은 편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이 두 나라의 방문을 통하여 복잡하게 얽혀 머릿속을 헤매던 역사의 한 귀퉁이를 해소했다는 기쁨이 넘친다.

 그리고 가장 유익했던 것은 바울과의 만남과 대화이다. 가는 곳마다 만나고자 했고 소통하고자 했다. 그는 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짙은 안개를 많이 거두어 갔고 상당부분 밝음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제 비단길의 종착지를 떠난다.

----생각조각-----

터키여!

2013.4.12. 18:45

극동의 흉노여!
돌궐이어, 투르크여
유목의 고단한 삶을 따라
예까지 온 숙명을 누가 아랴
오직 그대들만이 아는
고행의 길에
가끔은 뒤돌아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곤 했을 터이지만
이제 천년, 이천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초원의 길을 달려 여기에 이르렀느니
그 땀과 피를 그대는 알고 있으리!
샤머니즘의 끝에서
초생달을 하늘 높은 곳에 달아
바람도 없이 펄럭이며
동서양의 갈림길에서
더하려 했던 그대,
술탄이니, 칼리프니 하는 종교・정치적 이야기는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그대 모두의 사랑을 담아
유라시아의 꽃을 모아
통다발로 묶기를 원하노라.
그대여, 터키여
가능성의 나라여
이제 발돋움의 한 가운데 서서
균형감각의 두 팔을 들고
축구공을 가슴에 달고
또 다시 달려가야 할 너
앞으로 다가올
그 분의 자비에 감격하라
영원히.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기독교와 이슬람교이 공존하는 성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 그리고 톱카프, 돌마바흐체를 비롯한 거대한 궁전, 세계 3대 음식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터키 음식, 그리고 우리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형제 나라. 노래 ‘우스퀴다라 머나먼 길….’의 고향. 시미트와 케밥의 나라, 아! 하란과 카파도키아의 데린쿠유와 괴뢰메, 파묵칼레, 이스탄불과 보스포러스해협 그리고 아름다운 도자기 타일을 만날 수 있는 곳, 터키! 다만 이번에 경험치 못한 수리아 안디옥, 밧모섬, 트로이와 아라랏산, 소금호수, 반 호수, 넴루트 다이, 세마춤 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터키로 부를 것이다. 올 것을 기대한다. 그때는 반드시 보고 갈 곳에 대하여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떠나리라.

20:50, 비행기에 오르다.
21:20, 이륙하다. 태양 반대쪽으로 간다. 비행시간이 갈 때보다는 빨라질 것이다. 모니터 화면이 뜬다.

     속도 : 590km/h           고도 : 10,688m
     뒷바람 속도 : 133km/h    도착지까지의 거리 7,012km
     출발지 시간 : 23:21       도착지 시간 05:21
     도착잔여시간 : 7:36       도착예정시간 : 12:57

 영화를 보다가 자다가 하다

- 이제부터 시간을 한국시간으로 바꾸다.  터키시간 : 05:35, 한국시간 : 11:35

11:35, 깨다. 많이 피곤하나 견딜 만하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와는 또 다른 체험을 통하여 감동과 아픔을 함께 하게 한 순례였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 많음을 통감하다.

----- 생각조각 -----

귀국 길에서

2013.4. 13. 12:39

드디어
우리 영공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는 공기 맛이 다르다.
어떤 때는 국적기國籍機를 타기만 해도
기분이 피어난다.
이번 순례는 바울을 따라 다녔다.
그가 다닌 전도여행을
터키에서는 순서에 따라 
그리스에서는 거의 역순으로 다녔다.
실은,
아브라함을 불러주시고
바울을 불러 주신
하나님을 따라 다녔다.
이스탄불, 하란, 다소,
카파도키아(데린쿠유의 지하도시, 동굴교회, 등),
비시디아 안디옥교회와 파묵칼레
소아시아 7대교회(라오디게아, 빌라델피아, 사대,
두아디라, 서머나, 버가모, 에베소),
못 가 보아 아쉬운 밧모섬,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고린도, 겐그레아,
메테오라의 공중암석수도원,
베뢰아, 데살로니가, 아볼로니아,
암비볼리, 네압볼리, 빌립보,
다시 이스탄불 …….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사도 바울이 보호하여
먼 길, 오랜 시간을
잘 다녀왔다.
이제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하나,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믿음의 나라로
속히 인도하옵소서.

13:05, 인천공항에 도착하다. 밖으로 부터 몰려오는 공기와 말소리가 다정하다. 조국이다. 조국이 없으면 이 아름다운 공간이 진정 아름다울까? 조국에 감사하고 조상에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이 아름다움 창조하신 그분께 감사한다.
13:47, 짐을 찾고 쉬고 있다. 정말 다 왔다. 아이들에게 ‘밴드’에 도착을 알리다.
14:19, 공항에서 출발하다.
17:00, 춘천에 도착하다. 아내 차는 춘천 KBS 앞 곰배령 옆에서 13일 동안 주인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춘천은 더욱 깨끗하게 보인다. 돌이 무너진 것을 많이 보아서 그런가? 아름다운 춘천!
17:20, 집에 도착하다. 집에 오니 정말 이곳이 천국이다. 어머님이 계시고 초코(우리 집을 수호하는 견공犬公)가 반긴다. 우리의 보금자리에 대한 새삼 감사한다. 끝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이제 나에게 숙제만 남았다.

----- 생각조각 -----

하나님!

2013.4.13. 17:50

외형은 교회인데
미나레가 솟아 있고
박물관이 되어 있고
관광지로 변하였고
Church bar가 들어서고,

내부에는
코란이 쓰여 있고
또 다른 곳곳에는
쓰러진 기둥만 나뒹굴고
평생 세 번만
교회에 가고

말씀을 배워
평생 동안 삶으로 실천하는
유대교도들도 있는데
하나님!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큰 영광이 드러나는
믿음의 나라로
거듭, 거듭나게
인도하옵소서.

 출발하면서 질문한 것이 있다. 나는 어떤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출발하기 전에 이 성지 순례에서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것은 바울처럼 나 자신이 하나님의 편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주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평화로워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낼 것인가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실행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  pp. 389~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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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생애와 선교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다. 당시로서는 전 세계라 할 수 있는 소아시아와 헬라, 로마에 이르기까지를 몇 차례 왕복하며 선교 활동을 전개하여 이스라엘과 그 주변에 머물렀던 기독교를 지중해 지역으로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바울의 생애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에서도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각종 서신서나 기록을 분석해 볼 때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 바리새인으로 자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회심回心하였다.
 잘 아시다시피 바울의 삶은 회심 이전과 회심 이후가 완벽하게 달라진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철저하게 박해하던 사람에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 말씀을 전도하는 사역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는 바울의 생애를 회심 전, 회심, 회심 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Ⅰ. 회심 전의 바울 

 바울은 사도행전과 빌립보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대인이며 다소에서 태어났으며 가말리엘 문화생이었다. 또한 로마시민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처벌하던 사람이었다(행22:3~4).

 1. 바울은 유대인이었다.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이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빌3:5)’라고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유대인으로 갖출 것을 다 갖춘 정통 유대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2. 그는 로마 시민이었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행22:28)’고 말하고 있다. 로마 시민권은 고대 로마 시민에게 주어진 특별한 권리다. 여성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로마의 충성하는 외국인이나 10년간의 노예 생활을 한 노예들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다. 사도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어려울 때도 많이 있었지만 로마시민권자라는 것으로 인하여 로마의 보호를 받았으며 로마에 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3.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빌3:5)’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또 바울의 이름은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고 스데반의 순교 때 사울, 즉 바울의 실명이 처음 등장한다. 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8:3)‘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교회를 파괴하고 성도들을 탄압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대표적인 반기독교이고 율법적인 청년이었다.
 
 4. 가말리엘 문화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다.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의 덕망 높은 바리새인이면서 교법사였으며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로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행22:3).’
 또 ‘아굴라와 그의 아내 부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18:2)’,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다(18:3)’고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어디를 가도 먹고사는데 는 큰 지장이 없는 천막 기술자였으며 헬라어와 유대어에도 능통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래의 선교 지도자로 예비하신 것으로 보인다.  

 5.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바울의 기독교 박해는 외국에 까지 미치고 대제사장의 위임도 받게 되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26:9)’,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행26:10)’,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 까지 가서 박해하였고(행 26:11)‘,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행26:11)’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였다.
                                                                                 - pp. 404~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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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일보 보도 ⏏

[책]성경 속 그곳을 마주하다
2016-4-29 (금) 10면 - 이하늘 기자

   ◇도서출판 예맥 刊, 417 쪽, 1만8,000원.

허대영 춘천YMCA 부이사장 터키·그리스 성지순례 다녀온 후기`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에 담아말과 글로만 접하던 예수의 손길과 발자취가 담긴 그리스와 터키 성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진 체험담이 담긴 책이 발간됐다. 허대영 춘천YMCA 부이사장이 지난 2013년 4월1일부터 13일까지 강원CBS개국 18주년 기념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기를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 책에 담았다. 이 책은 성지순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성지순례 후 터키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게 되는 과정을 시간 단위로 꼼꼼하게 기록해 성지순례를 준비하는 신도들에게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일반 여행객들에게는 여행가이드 책으로서 충분한 정보가 담겨 있다. 보통의 여행기는 주요 장소와 사건만 나열하는 식으로 담겨 있지만 이 책은 여행하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 쉽게 읽힌다. `들뜬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준비하며'로 시작되는 이 책은 `이스탄불, 드디어 꿈의 도시에 첫 발을 딛다'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을 찾아서'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신앙의 꽃을 피운 카파도키아' `터키 최고의 자연+인문=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 등 14개의 파트로 구성돼 마치 처음부터 여행을 함께 한 기분이 들 정도다. 특히 성경의 내용과 사진이 함께 수록돼 있고, 성경에 나오는 그 장소를 실제로 방문하며 느꼈던 감정과 생각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성지순례의 숭고한 뜻을 생생하게 전달해 눈길을 모은다.저자 허대영은 홍천 출신으로 도내 초·중·고교 및 교육기관을 거쳐 강원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영월·춘천교육장을 지낸 후 2011년 홍천농업고교에서 정년퇴임했다. 1965년 첫 문집 회상을 발간 후 아동문학,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조집 `영월찬가', 동시집 `봄이면 매봉채는 진달래 바다' 등을 펴냈다.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도협의회장, 도문인협회장, 도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한서 남궁억연구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춘천YMCA 부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강원문학상, 한국사도대상, 황조근정훈장, 제10회 동곡상(교육연구 부문) 등을 수상했다. 이하늘기자 2sky@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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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저자 소개
책쓴이_허대영

 주님께서는 고등학교 때 개인 문집을 만든 문학 소년을 동시와 시와 시조, 그리고 성지순례기를 쓰는 작가로 문단에서 활동하게 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41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자 미군정 교육정책에 대하여 다양한 분석을 한 교육학자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신실한 믿음을 허락하시고 교회학교 교사, 샘장(속장, 구역장과 같은 직분)과 협동장로로 일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하여, 저자를 교육자, 시인, 학자, 기독교인 등 다양한 지성과 풍성한 상상력으로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치는 중견 작가로 길러 주셨다.

 문학 소년은 작가로 성장하고, 여기에 교육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익힌 교육 철학을 더하였으며, 교회에 출석하며 순종하는 믿음생활 등 삶의 궤적들을 잘 조화시킨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를 장로이자, 시인이며 교육자 및 학자가 동서고금을 수시로 넘나들며 자유로운 성지순례 일정에 따라 쓴 새로운 성지순례기의 틀을 보여 준 수작이다.

◈ 아동문학가이며 시조시인이 되도록 인도하셨다.
 저자는 습작기를 거쳐 1978년에 교육자료에 동시 천료, 1992년에 아동문학에 동시 신인상, 그리고 1995년에 시조문학에 시조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지금은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아동문연구회 회원, 강원도문인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강원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강원도문인협회장을 지내는 등의 다양한 문단 활동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동안 작가는 문집《회상(1965년)》, 시조집《영월찬가(2009)》, 시집《사랑한다 함은(2010)》, 《다시 불어오는 바람(2011)》, 동시집《봄이면 배봉채는 진달래 바다(2011)》 그리고 이번에 두 권의 성지순례기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찾아서(2016)》,《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2016)》을 상재하였다.

◈ 초등학교 때 교회에 나가 작은 손을 모아 기도드린 것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불러 믿음을 굳게 다져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교회에 발을 디디고 하나님을 알게 된 이래 교회 문을 드나들다가 쉬었다가를 거듭하면서 50여 년 동안 믿음 생활을 하였다. 특히 고등학교에서부터 결혼하여 아내를 만나 다시 교회에 갈 때 까지 20여년은 긴 공백 기간이었다. 아내의 인도로 다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오늘날까지 삶과 믿음을 지켜 주시고 계시다.
 그의 문장 시선은 앞에서 말했듯이 세 곳으로 집중되고 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어떤 분인지’와 ‘그분은 나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그분을 찾아 나서는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하는지’가 그것이다. 세 곳 방향에서 뿜어내는 촉각이 곳곳을 예리하게 파헤쳤음을 가슴으로 읽으면 온 몸이 전율하게 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에서 느끼는 단순한 풍경으로써 성지가 아닌, 현실로 되살아 현재의 의미가 부여되는 성지 소개를 하는 등 예리한 통찰력이 통하여 곳곳에서 눈부신 재발견의 빛을 더욱 발하고 있다.
 현재 저자는 춘천중앙교회(기독교 대한감리회)에 출석하면서 협동장로로 일하고 있으며 춘천YMCA에서는 부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 초・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육전문직 그리고 교감・교장, 대학 출강 등 다양한 교직 세계를 경험하고, 연구 결과를 저서로 남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다.
 초・중・고등학교 교사 및 장학사, 연구사, 장학관, 연구관, 교육장과 일선학교의 교감・교장을 지내면서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감수성과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사로서 일반사회와 역사와 종교에 대한 다양한 접근, 그리고 교육행정기관에서 겪은 수직・수평적 상황 등의 폭넓은 을 인간관계의 경험을 통하여, 그의 문장은 화려하고 수사적인 장식에 그치지 아니하고 순수하고 간결한 필치로 교육적 감성을 담담하게 물 흐르는 듯이 정리하도록 인도하셨다.
 교육 및 학문적인 저서와 논문으로는《연구학교 운영의 실제(1994~1997)》,《수학과 수준별 이동수업(1996)》,《하나되는 통일교육(2003)》,《오천석과 미군정기 교육정책(2009)》,《학교분쟁 해결방안(2011)》,《학교자체 평가 정책과의 개선과 현장 착근 방안 모색(2012)》등이 있으며, 강원대학교, 강원대학교교육대학원, 한림성심대, 한국방송대 등에 출강하게 하셨다.

◈ 교육대학(2년제) 졸업 이후 야간과 계절제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 주셔서 학문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저자는 춘천교육대학과 구원주대학(현상지대학교 전신)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강원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력에는 중간 중간 빈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육대학 졸업 후 교사를 하면서 야간 대학을 졸업하였고, 중등 교사로 옮겨 근무하면서 고려대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강원도교육연구원에서 연구관을 지내면서 강원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지속적인 향학열은 학문의 최고 경지에 이르기까지 하면서 강원도의 노벨상인 동곡상 (교육연구부문, 2015년)을 수상하게도 하셨다.

◈ 정년퇴임은 인생의 후반기를 주님의 세계로 접근할 수 있게 미리 계획하셨다가 성지순례를 계기로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아름다운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셨다.
 2011년 8월 말에 41년 3개월간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직장 생활을 하던 때에는 꿈에서만 그리던 성지순례를 떠나게 된 것이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거치는 동안 출애굽의 고난 속에서도 4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모세의 피와 땀을 보았고 이스라엘에서는 갈릴리 호수에서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압축하여 묘사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2013년에는 그리스 터키에도 보내 주셨다. 그리스는 고대문명의 발생지중의 하나이고 고대 민주주의가 꽃피웠던 곳이다. 찬란한 고대무명의 흔적이 넘치는 그리스와 바울의 전도 여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터키에서 저자로 하여금 믿음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저자는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지순례 기회를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가 공직에서 퇴직한 후에 용감하게 나설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더군다나 2012년 1차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성지순례기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찾아서”에 이어서 이번에 터키와 그리스 편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을 출판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우리 어머님 박옥순 여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들어도 철이 들지 않는 자식 때문에 늘 걱정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하고 배려가 많으셨던 우리 어머님.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한 동행하여 함께 감동을 나누었던 아내와 늘 든든한 후원자인 세 딸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난 2005년에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을 다녀온 바 있습니다. 그곳은 굳이 분류하자면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래 기독교가 융성했던 중세와 이후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물론 성지만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지역을 순회하니 자연히 성지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과 그리스-터키, 그리고 서유럽 여러 나라까지를 보았으니 출애굽에서 바울의 선교지, 그리고 로마의 기독교, 종교개혁까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셈입니다. 또 페루에서는 크리스트교가 중남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보았습니다. 주신 행운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동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스페인을 다녀오고 싶고, 지금은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지만 이란, 이라크, 시리아도 성지순례의 큰 그물망 속에 넣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곳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달려갈 것입니다.
 이번 성지순례에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회심을 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세계 선교 꿈을 성실하게 실천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눈과 가슴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세계 복음의 싹을 틔우는 3월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기를 마무리합니다.


12. 출판사 리뷰

“성지순례에서 얻을 것은 풍경을 보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증거한 바울을 만나고
최종적으로는 나를 다시 발견하는 것”

성경 속에나 있는 이야기를 현실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고단하나 성스러운 순례 길 위에서
성경 구절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주님 나라의 고아가 되어 갈 곳을 잃을 뻔한 나를 다시 되찾아
그분과 뜨거운 마주침을 통하여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선물 받았던
점점의 시간과 사진과 지도를 잘 버무려 정리한 진솔한 기록들.

 글에는 어떤 글이든지 지향점이 있다. 이글의 지향점은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어떤 분인지’와 ‘그분은 나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다해 전도하신 바울에게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다짐해야 하는지’가 그 대상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물음에 합당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피상적인 풍경을 보고 재미를 느끼며 맛에 취하고 새로움에 대한 흥미를 느끼는 단순한 여행과는 다른, 성지 순례의 본질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 고대와 현대를 오가는 통사적 관점에서 보는 성지, 말씀, 느낌 그리고 다짐들.

 저자는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그 시대의 시대적 바탕을 읽을 수 있고 바울이 만나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오늘날의 현장에서 믿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빛나는 샛별을 곳곳에서 발견하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아래는 바울의 생가터를 방문하고 기록한 부분이다. 

09:25, 바울의 생가 터를 방문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예수가 죽은 지 불과 몇 년 뒤에 회심한 그는 새로운 종교운동, 즉 그리스도교를 지도하는 사도가 되었으며, 그 운동이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세계 종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남긴 서신들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신학적인 정교함과 목회적인 이해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의 생활과 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바울(Paul) ----- 
 바울은 AD 10(?)년 경에 다소에서 태어났다. 67세 전후하여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바울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약성경’ 외에는 믿을 만한 자료가 없으며, 그 1차적인 자료는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그 가운데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쓴 서신들이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또 많은 학자는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서, 빌레몬서 등도 바울의 서신으로 간주한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나 긍정하는 편이다. 성서학자들은 목회서신인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는 바울의 서신이기는 하나 쓰인 것은 바울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바울의 개종과 선교 활동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울 사후 몇 년 뒤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바을과 관련된 성경이지만 바울이 직접 쓰지 않은 것으로 보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 견해는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

 바울의 생가로 알려진 공원 터에 우물이 있고 물을 끌어 올리는 굵은 쇠바퀴가 달린 도르래가 있다.
 바울은 로마군에게 체포되었을 때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 유대인으로 결코 소읍이 아닌 도시의 시민’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힌다.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출신배경과 로마시민권, 가말리엘 가문에서의 교육, 천막기술자 등은 그로 하여금 세계 선교사역을 담당할 수 있게 준비된 사도였음을 의미한다.
 다소에 있는 사도 바울의 우물가에 서서 그때 그날들을 생각해 보았다. 여기가 세계 선교의 출발점이 아닌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앞으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소아시아의 7대 교회와 그리스의 아테네, 고린도, 마테오라, 네압볼리, 빌립보, 암피볼리, 베뢰아,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를 거쳐 이스탄불로 순례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고 싶어 하면서도, 바울처럼 뙤약볕 아래를 걸어간다거나 풍랑이 심한 바다 위에서 조각배를 타볼 생각은 해보지도 않는다. 그가 다닌 험한 순례길을 우리는 편안하게 버스와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라는 큰 인물을 낚으신 예수님은 다메섹 황토길 위에서 자신의 구원사救援史*를 완성할 바울이라는 또 다른 반석을 거두셨던 것이다.
 자! 여기서부터 바울 따라 떠나는 여행이다. 그의 발자취를 그가 다닐 길 그대로 그 순서대로 다닐 수는 없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하였는지를 보고 듣고 깨달으리라.
 * 구원사 : 원래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 인간은 죄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값으로, 악마의 세도는 무너졌으며, 인류의 죄는 용서받게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 혹은 구세주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를 구원사 혹은 구세사라고 한다(로마 10,9-10).

 사도 바울 생가터 앞 광장 주위의 집들은 거의 사백년은 넘은 오스만 제국 시대의 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 건축 양식이라는데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어울려 조화가 잘 이루어진다. 바울의 집터로 추정되는 발굴 현장은 유리로 덮어 놓아 실물을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소의 옛 도시는 4~6m나 땅 속으로 파 묻혀 버렸기 때문에 발굴하려면 그만큼 파고 들어가야 한다.
 바울도 이곳의 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몰려다니며 장난도 치고 사고도 저지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09:45, 바울의 생가터에서 출발하다
 생가터 들어가는 입구에 큰 교회가 서 있는데 아직 마무리 작업을 하지 못한 듯하다. 물어보니 짓는 것 까지는 허락하였는데 그곳에서 교회를 열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그런 상태로 있는 것이라 한다. 건축의 자유는 있지만 신앙의 자유가 없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09:56, 클레오파트라의 문(바울의 문) 에 도착하다.

----- 클레오파트라의 문에 얽힌 이야기 -----
 BC 41년 타르수스(다소)를 순방 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크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타르수스로 소환하여 문책할 생각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의 키드누스 강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였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그녀는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비스듬히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였다. 그리고는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고는 한 쪽 귀걸이를 떼 내어 식초 잔에 담근 후 서서히 녹아 버린 진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저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이 다닌 문이라고 하여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Plinius)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 사족 : 클레오파트라/시저/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인데, 남동생과 결혼하여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집트는 알렉산더대왕이 점령하기 전에 이미 31개의 왕조가 교대로 통치하여 왔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4세기경에 이집트를 정복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알렉산더 제국은 그의 장군들 사이에서 분할되어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차지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데, 로마의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점령자인 카이사르에게 몸을 맡긴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안토니누스와 다소에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로마는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을 받은 안토니누스 간의 대립이 있었고, 악티움 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게 되어 로마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는 침대에서 독사가 물게 하여 죽었다고 하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사이에는 아들을 두었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안토니우스와는 정식 결혼하여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보면서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다소의 거리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Hello' 하며 반가움을 표한다.
 
----- 사족 : 알렉산더에 대하여 알아보자 -----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BC 356~BC 323)은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학문을 배웠다. 20세에 왕위에 올라 그리스 여러 도시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기원전 334년에 해외 원정에 나서 페르시아·시리아·페니키아·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였다. 그는 정복한 곳마다 그리스 사람을 옮겨 살게 하여, 그리스 문화와 아시아 문화를 교류 융합시킴으로써 헬레니즘 문화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10:06, 클레오파트라 문에서 출발하다
11:00, 고속도로 상에 있는 ‘LOKANTA’라고 쓰인 식당에 도착하다.
 고속도로에 있는 식당이다. 이른 점심 식사를 하다. 과일도 있고 하여 꽤 먹은 셈이다. 바울은 어땠을까? 여기저기 다니느냐고 이국 음식을 많이 먹었을 터인데 혹 식성이 좋아 별 어려움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고속도로이지만 바울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걸어서 가는 길은 피곤한 길이었을 것이다. 반겨주는 사람이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고통의 길을 사랑의 길로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 유적지가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유적이 상당부분은 남아 있는 이유는 그들도 구약의 상당부분을 기독교와 공유하기 때문이다. 신약과 관련된 곳은 그냥 보통 유적에도 못 미칠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이제 관광용으로 가치가 있다고 하여 보존과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 역사의 기록, 성경 말씀, 현장의 모습을 전문적으로・분석적으로 접근하며, 곳곳에서 우리나라와 동병상린의 기억들을 함께 전하는 다양한 종합 기록을 가슴으로 담아내며

 터키는 우리를 현제의 나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우리의 관심은 그렇게 넉넉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터키에 대하여 서술한 글을 읽어 보자. 

 터키와 이스탄불에 대하여 알아보자.

 터키 국기는 빨간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 하나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터키에서는 가는 곳 마다 국기가 게양된 것을 볼 수 있다. 자랑스럽게 나부끼는 것을 보고 이 나라의 애국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국기를 많이 다는 것이 애국심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는 관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 터키에 대하여 ------
 터키공화국은 서남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동 트라키아에 걸친 나라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다. 터키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 남쪽으로는 지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와 동 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 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이다. 따라서 터키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인종상 터키인이 국민 대다수를 이루며, 그 다음으로는 쿠르드인이 있다. 터키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이며, 공용어는 터키어이다.
 터키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후계 국가이다. 제1차 대전(1914년~1918년)에서 동맹국 편으로 참전 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현대의 정치체제가 확립되었다. 터키는 한국 전쟁에서 국제 연합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으며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하고 있다.
 국토 면적은 호수를 포함한 터키의 육지 면적은 783,562km²이며, 아시아에 속한 영토는 전국토의 97%인 5755,688km²이고, 유럽에 속한 영토는 3%인 23,764km²이다. 터키는 길이로는 1,600 km, 폭 800 km에 이르며, 세계에서 37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터키는 6·25 때에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여 인연을 맺었다. 한국과 터키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직 인류애로서 지원병을 파병하였다. 당초 한국전쟁에 50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낼 작정이었으나, 모병결과 1만5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자원을 했으며, 1만4936명을 파병했다고 한다. 한국동란에 참여한 군인이 운영하는 상가 간판에는 코렐리(Koreli-한국인 뜻)라는 이름을 표시하고, 후손 이름 앞에 `코넬리`라는 표기를 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며, 그만큼 우리에게 호감과 사랑을 가진 나라이다.

 터키는 유럽의 선진국보다 한국인을 일등 국민으로 대우를 한다고 하니 세계에서 한국인을 가장 사랑하는 유일한 국민이다. 터키는 지금까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며 한국이 잘 살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고 한다. 88 올림픽 때에는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며 기쁜 나머지 24시간 내내 TV 방송을 하기도 하였고, 국제 대회 때마다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73년 한국과 터키는 우호 협력의 관계를 보다 증진시키고, 한국 참전 전사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터키 앙카라의 옛 기차터미널 근처에 '한국공원'을 한국 정부가 조성하였고, 한국 여의도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에 '앙카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터키는 우리와 같은 몽골족이고 언어는 같은 알타이어를 쓰고 있다.

 이제, 우리가 첫날밤을 보낼 이스탄불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서양의 교차되는 혼합된 도시 이스탄불. 우리는 밤에 도착하여 휘황찬란한 겉모습만 보면서 유라시아의 관문에서의 첫날을 시작하였다.

----- 이스탄불(Istanbul) -----
 옛 이름은 Constantinople, 고대 이름은 Byzantium. 터키의 최대 도시이며 바다에 접해 잇는 항구이다.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이스탄불의 이름은 네 번 바뀌었다. 비잔티움은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곳으로서 BC 512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의 지배를 받다가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수도로 채택되면서 '신로마'(New Rome)로 개칭되었다. 330년에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Mehmed II)* 치하에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뒤 1922년까지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은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이스탄불에는 유물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에레바탄 사라이 궁전(지하 궁전), 콘스탄티누스 궁전('텍푸르 사라이'라고도 함),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톱 카프 궁전, 돌마바흐체궁전, 슐탄아흐멧 모스크(블루모스크), 히포드롬, 갈라타 다리, 포스포러스대교 등이 유명하다.
 * 메메드 2세(Mehmed II) : 무라드 2세의 넷째아들로 여자노예의 몸에서 태어났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두 차례(1444~46, 1451~81 재위 )지냈다. 뛰어난 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스탄불에 대해서는 마지막 날 더 이야기하기로 한다. 갈매기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고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경계는  자연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자기 이름을 본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하였다. 관련하여 찾아보니 종교학 사전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나온다. 이 신조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주의(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Arius)의 신학 사상, 삼위일체를 부인)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 우리 자녀에게 해야 할 참 좋은 투자, 제일 먼저 해야 할 투자를 생각하며, 아동문학가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쓴 성지 이야기
 저자가 몇 군데서 밝힌 바와 같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않고도 믿는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으나(요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믿음이 약한 분들이나 믿음의 역사 현장을 보고 싶은 욕망이 넘치는 분들에게는 성경적 지식과 기록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여 저자처럼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과정을 통하여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실천의 다짐도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좋은 투자라는 글을 통하여 성지순례의 효과에 강하게 전해 주고 있다.
 저자는 아동문학가이다. 그의 표현방식에는 아동들의 동심을 고려한 언어적 선택이 고려되어 있다. 하여 초등학생이라도 글을 읽을 줄 알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묘사하여 어린 시절의 성지 접근을 도와주고 있다.
 저자는 그의 저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찾아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 생각 조각 ⏏

좋은 투자

2012.5.6.10:38

자녀에게
땅이나 집을 사 준다거나
좋은 과외 공부를
많이 시키는 것보다
어린 시절에 성지 순례를 보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슴 깊이 간직하게 하고
그분과 평생
동행할 수 있는
벅찬 감동을 주는 것.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과 진실로 만나게 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특별히 생각조각에서는 어린 시절에 성지 순례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세계사를 일부 배우게 되는 데 그때부터 학생들이 눈이 세계로 뻗게 된다. 바로 이때에 성지 순례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임을 시시하고 있다.
 우리 격언에 남들은 돈을 주고 팔아서라도 모면하고 싶은 고생을 일부러 돈을 주고 사서 맞아들인다는 뜻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도 있다. 이 모두 젊은 나이에 겪은 고난과 시련들이 언젠가 본인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 또는 중등 학생 때 성지 순례는 고통이 동반된다. 지루하게 타야 하는 버스승차, 아름다운 모습도 아니고 새롭지 않는 그렇고 그런 모습을 날마다 보아야 하는 지루함, 사막에서 펼쳐지는 더운 날씨와의 싸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나 설명 등이 학생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소년 시절의 경험은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와 하늘을 향한 그들의 소망을 활짝 피워 내는데 큰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이 책도 어린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문체로 쓰였다. 소년소녀 시절의 경험을 영원히 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자녀들에게 일독을 할 수 있도록 권하고 싶다.  

◈ 성지 순례를 가장 먼저 가야할 분도, 성지순례기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분도 목회자들이라는 생각에 그 분들을 위한 최소한 자료를 사전 대비, 현지 메모, 순례 후 필요한 자료 검색 등을 통하여 성지 순례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저술.
  성직자는 성지 순례를 다녀와서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현장감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관련 성지 순례기를 숙독해야 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지순례는 사전에 많은 것을 살펴보고 준비해야 한다. 18세기의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이며 수필가였던 사무엘 존슨은 ‘여행에서 지식을 얻고 돌아오고 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 한다’ 말하고 있다. 즉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가면 아는 것이 많을 것이고 그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성지순례는 사전 준비를 많이 할수록 풍성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무너진 건물더미나 오래된 성터, 그리고 알 수도 없는 희미한 흔적들만 보고 다니다가 오게 된다. 감동이 없는 아주 무의미한 여행을 하게 된다.
 아울러 여행을 다니면서도 기록을 남겨야 함을 강조 하고 있다. 저자는 ‘나는 메모광이다. 특히 여행에서는 메모광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이번에도 작은 노트 두 권을 썼다. 기억은 불명확하고 또 오랫동안 파지할 수 없다’ 고 말하고 있다. 
 또 다녀온 뒤에는 반드시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 다녀온 즉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데 그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고 다양한 경험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전 준비, 현지에서의 기록, 다녀온 뒤 정리 등이 일관성 있게 이루어질 때 좋은 성지 순례기를 남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목회자님들께서는 성지순례를 반드시 다녀오시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이 순례기를 통하여 그 갈증 해결이 어느 정도 가능하도록 치밀하게 기록되었다.

◈ 함께 하는 분들의 호흡을 느끼는 일체감과 현장감 있되, 다른 순례기와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기록하여 저자와 독자가 동행하게 만드는 독특한 전개 방식  
 저자의 성지순례기는 아주 독특한 면이 있다. 우선 서술이 진솔하다. 여행을 출발하여 돌아 올 때 까지 일정의 시간에 맞추어 차례차례 정리한 것이어서 마치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기록의 일부를 보자.

05:30, 일어나다.
06:30, Morning Call,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07:20, 식사를 하다.
08:30, 승차. 출발하다.
09:17, 바울의 생가가 있는 ‘다소’에 도착하다. 우리가 잠을 잔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울의 고향 다소가 있다.

이러한 섬세한 기록은 같은 코스를 여행하는 분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뿐 만아니라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도 정확한 자료로 제공될 것이다. 
 저자는 또한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잡음에 있어 읽는 분들로 하여금 궁금한 것을 모두 모아 자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과 관련된 설명 자료 가 있고 그 지역이 바울에게는 어떤 지역이고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관련 된 성경구절은 무엇이며 거기고 느끼고 감동받은 것을 생각조각으로 남겨 정리를 하고 있다.

14:30, 아레오바고에 도착하다. 이제 아크로폴리스 관람이 시작된다.
 아레오바고는 인류 최초의 법정이다. 여기서부터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와 그 위에서 주변을 조망하였다. 우리는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서 그곳을 관람한 후 멀리 있는 아고라 제우스 신전 터도 보았다.
 아레오바고. 바울이 선교한 곳이다. 목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 와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자들을 앞에 놓고 기독교를 전도한 곳이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까만 석판에는 바울이 설교한 성경 말씀이 판각되어 있다.
* 스토아학파(Stoicism) :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 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고대 그리스 철학.
*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 : 일반적으로 쾌락·행복이 최고선이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 고대 그리스 철학

----- 아레오바고(Areopagus) -----
 아레스(Ares)의 언덕’이란 뜻. 아덴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높이 115m의 석회암 언덕(행 17:19). 헬라의 개혁자 솔론이 세운 대법원이 있었다. ‘아레스의 언덕’이란 헬라의 전쟁신 아레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하리로티오스를 살해하여 처음으로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고사에 근거하여 명명되었다. 아레오바고 회의는 아덴에서 가장 역사 깊고 또 최고 권위를 인정받은 회의로서 초기에는 소송을 다루는 ‘법원’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 이르러 아덴의 풍습과 도덕과 교육을 관장하고 또 새로운 종교나 철학이 유입되는 것을 통제하는 일종의 감독기관 역할까지 하게 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청중들은 그 말을 거부했으나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아레오바고의 관리인 디오누시오가 있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관해 전했는데, 그리스 철학이 체질화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했고 소수의 사람들, 즉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행 17:22~34)’을 비롯하여 믿음의 동역자를 얻었다.

----- 성경말씀 : 사도행전 17:16~19 ; 22~24 ; 34 -----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하다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Epicurean)와 스토아(Stoic)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 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썽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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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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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크로폴리스 북서쪽 300m 떨어진 곳에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200m 가면 아고라가 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에 하드리아누스 문과 제우스 신전, 더 오른쪽에 올림픽 경기장도 있다.
 아레오바고 뒤에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그곳에 파르테논 신전, 니케 신전, 프로필레아, 에레크테이온 신전이 보인다. 바울은 거대한 신전들을 보고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였다. 대단하다. 강력한 설교 말씀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바울이 쟁론을 벌이던 아레오바고 언덕 오른쪽 끝에 말씀이 적힌 검은 동판이 보인다.

 우리 성지 순례단이 이곳에 온 것은 인간이 지은 거대한 신전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2,000년전 이 우상 신전 앞에서 큰 소리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17:24) 라고 외친 사도 바울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 작가로서의 섬세한 문장력, 교육자적 도덕성과 통찰력, 순종하는 뜨거운 동반자적 영성이 동행하며 순례하는 글
 저자는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다. 그 문장이 어찌 섬세하지 않으랴. 문장 곳곳에 빛나는 아름다운 문체와 상황을 통찰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보통 사람은 그냥 지나 갈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 거대한 수레바퀴를 발견하기도 하고 사상과 이념의 지나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소양은 방문 지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소양 그리고 오랜 교직생활에서 얻어진 자연과 인문에 대한 섬세한 관찰력이 문학적 기초 토양 아래 빛나는 문장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향하는 굳은 믿음이 문학의 향기로 되살아나는 그의 글에서 고대와 현대를 이어가는 오작교를 새로 세워 가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게 된다. 그래서 그냥 문학이 아니고, 그냥 보통 순례기가 아닌 문학과 영성과 교육이 동행하는 순례기로 꽃피워 진 것이다.

◈ 저자는 이 순례기를 읽을 때 다음 과 같은 내용을 참고하라고 권하고 있다.

□ 잠깐!  이 성지 순례기를 읽으실 때 참고하세요.

첫  째, 성지순례 일정에 따라 썼습니다.
둘  째, 순례기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맑은 고딕 11포인트로 정리하였습니다.
     2. 생각조각은 순례 중 특별한 생각이나 느낌을 따로 정리한 것입니다. 때때로 시적詩的 표현이 있습니다만 시라고 하기보다는 시적 느낌으로 쓴 것이라고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성경 말씀은 지역, 사건 및 인물과 관련된 내용으로 최소한만 제시하였습니다.
     4. 이해를 돕기 위하여 순례지역과 관련된 참고사항을 많이 게재하느냐고 노력하였습니다.
     5. 때대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스쳐 갔다거나 멀리서 본 것이라도 중요한 것은 검색하여 제시하였습니다.
셋  째, 지도와 사진을 적절하게 배열하여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제공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넷  째, 성경말씀은 개역개정 큰글 성경(아가페출판사, 2005년판)을 참고로 하였습니다.
다섯째, 인명이나 지명, 역사적 사건 등은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도서출판 두란노에서 나온 비전 성경사전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특히 지명은 고대, 중세, 현대 그리고 성경 지명 등 다양하여 그 중 현재 많이 쓰는 것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여섯째, 서문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글을 정리하다가 부족하여 자료가 더 필요할 때에는 인터넷 검색으로 보충하였습니다. 그러나 미처 원저자를 기록하지 못하였습니다. 좋은 성지순례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오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일곱째, 대부분은 성지를 중심으로 순례하였으나 아테네와 이스탄불에서는 성지 외에도 세계문화 유산을 관광하였습니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자는 의미로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3. 차례
추천의 글
축하의 글
머리말
01 들뜬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준비하며
02 이스탄불, 드디어 꿈의 도시에 첫발을 딛다
03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을 찾아서
04 바울의 고향 다소를 지나 데린쿠유의 뜨거운 믿음을 만나다
05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신앙의 꽃을 피운 카파도키아
06 터키 최고의 자연+인문 = 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
07-A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넘치는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들
07-B 로마 문화의 흔적에서 바울의 강론을 듣는 에배소
08 거친 풍랑을 헤치며 수없이 오갔을 선교의 뱃길, 에게해
09 신들의 놀이터, 아크로폴리스에서 주님을 증거하다
10 고린도, 무너진 유적 더미에서 들려오는 바울의 음성
11 뜨거운 믿음을 만나는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 메테오라
12 비잔틴 고도古都를 바라보며, 영광 회복을 기원하며
13-A 성스런 지혜 아야 소피아 성당에게 명하노니, 기도하라
13-B 극동의 길손, 보스포러스 유람선에서 마음을 놓치다
14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믿음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 부록 : 바울의 생애와 선교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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